목표한 증상이 아닌 곳이 먼저 나았습니다. 한약 치료를 하다 보면 가끔 이런 일이 생깁니다.
기본 정보
나이·성별 : 71세 남성
상황 : 중증 COPD, 24시간 산소발생기 착용, 재택
기저질환 : COPD, 협심증·심근경색(스탠트 삽입), 공황장애, 불면증, 전립선비대증
방문 계기 : 장기요양등급 소견서 발급 + 한약치료 요청
복약 기간 : 약 2개월 (60일)
방문 당시 상황
장기요양등급 소견서를 발급해드리러 방문했더니 한약치료도 벼르고 계신 상태였습니다. 산소발생기를 24시간 착용하고 지내는 중증 COPD로 외출이 불가능한 분이었습니다.
주요 증상은 숨참, 가래, 기침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있었습니다.
- COPD 약을 복용하면서 설사가 심해짐
-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설사
- 배변 시 복통과 복부 팽만
진해거담제를 많이 복용하면 뱃속이 불편하고 설사가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분도 그런 상태였습니다.
문진과 처방 — 소함흉탕
문진을 해보니 흉부 증상, 수면 문제, 양적인 성향이 뚜렷했습니다. 적방이 소함흉탕인 것이 거의 확실했습니다.
그런데 설사가 있었습니다. 소함흉탕은 황련·과루실·반하로 이루어진 처방으로, 대변과 관련된 약재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과루실이 씨앗 약재라서 변을 물러지게 할 수 있어, 설사가 있는 이 환자에게는 과루실을 충분히 쓰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과루실을 적게 넣어 소함흉탕을 처방하고, 설사는 별도로 삼백탕으로 따로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상 밖의 일
복약 15일 후 설사가 줄기 시작했습니다. 한 달이 지나자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삼백탕은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COPD 약을 복용해도 설사가 없어졌고, 기름진 음식을 먹어도 설사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후 60일 복약 기간 내내 설사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과루실을 단계적으로 늘릴 수 있었습니다. 가래가 약간 묽어졌고, 기침이 소폭 줄었습니다. 수면 중 기상 횟수도 2-3회에서 1-2회로 줄었습니다.
COPD의 주 증상인 숨참은 운동 시에는 비슷했지만, 평소 생활에서는 덜 차는 수준으로 개선되었습니다.
COPD 증상 호전이 미미했던 이유
소함흉탕이 적방인 경우라면 가래와 숨참이 많이 좋아질 것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이 케이스에서는 약간의 호전만 있었습니다.
이후 다른 COPD 환자들을 보면서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미 폐에 기질적인 변화가 너무 심하게 진행된 경우에는 한약으로도 호흡기 증상의 큰 호전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한약은 기능을 회복시키는 데 특화된 치료 방법입니다. 그런데 기질적인 손상 — 폐 조직 자체가 이미 변해버린 상태 — 은 기능 회복만으로 되돌리기 힘든 한계가 있습니다.
더 나빠지지 않거나 조금의 호전이라도 있다면, COPD에서는 그것만으로도 한약치료가 잘 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분이 인상적이었던 이유
산소발생기를 24시간 착용해야 할 정도의 중증 COPD인데도 기력 저하는 크게 없었습니다.
산소기 줄을 길게 늘여서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고, 운동까지 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숨이 차더라도 움직이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외출이 거의 불가능하고 장기요양등급도 있는 상태였지만, 집 안에서의 꾸준한 움직임이 근력을 유지시키고 노쇠를 늦추고 있었습니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 중에는 숨이 차거나 아프다는 이유로 움직임을 최대한 줄이고 누워서만 지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걷지 않으면 빠르게 쇠약해집니다. 화장실에 걸어가고, 식탁에 나와서 밥을 먹는 것 자체가 다리 운동이 됩니다.
움직임이 치료입니다.
원장 기록
설사는 소함흉탕이 치료하는 증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삼백탕으로 따로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소함흉탕 하나로 설사가 먼저 나았습니다.
몸이 좋아지면 목표하지 않은 증상도 따라서 좋아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약이 특정 증상만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의 균형을 회복시키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COPD 증상의 호전은 미미했습니다. 처음에는 아쉬웠는데, 이후 다른 COPD 환자들을 보면서 이게 이 병의 한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질적인 변화가 너무 심하면 기능 회복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COPD에서 더 나빠지지 않는 것 자체를 좋은 결과로 봅니다.
이분이 산소기를 차고 집 안을 걸어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것이 이분을 버티게 한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임상에서 발견한 것
- 소함흉탕은 대변과 직접 관련 없지만 설사를 해결했다 — 몸이 좋아지면 예상 밖의 증상도 따라 좋아진다.
- COPD 진해거담제 부작용(설사·복통)을 한약이 완충해줄 수 있다.
- 중증 COPD에서 기질적 손상이 크면 호흡기 증상 호전에 한계가 있다. 더 나빠지지 않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 재택 환자에게 가장 중요한 처방 중 하나는 “계속 움직이세요”다.
개인에 따라 경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